산상수훈
오스왈드 챔버스 지음
▣ 저자 오스왈드 챔버스
찰스 스펄전의 목회 사역 아래에서 십대에 회심한 그는 에딘버그 대학에서 예술과 고고학을 공부했고, 그 후 목회자로 부르심을 받고 더눈(Dunoon)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그는 1906년부터 1910년까지 이집트, 일본, 미국 등지를 순회하며 성경을 가르치는 사역을 했고, 1910년 거트루드 홉스와 결혼해서 캐스린이라는 딸 하나를 두었다. 1910년 런던의 클래펌에 성경대학을 세웠고, 제1차 세계대전 발발로 1915년 문을 닫기까지 거기서 강의했다. 1915년 10월 그는 YMCA 소속 목사로 이집트의 자이툰으로 가서, 거기에 주둔해 있던 호주와 뉴질랜드 군대를 위해 목회 사역을 하다가, 맹장 파열로 수술을 받은 후에 1917년 11월 15일에 소천했다. 오스왈드 챔버스는 『더 나은 싸움을 위한 좌절』이라는 오직 한 권의 책을 썼지만, 현재 그의 책은 40여 권이 넘는다. 그가 직접 쓴 책을 제외한 나머지 책들은 법원 속기사였던 챔버스 부인이 평생에 걸쳐 자신의 7년간의 결혼생활 동안 남편 챔버스가 전한 메시지들을 속기로 기록해 둔 것을 출간한 책들이다. 남편의 사후, 챔버스 부인은 그의 메시지를 세상에 알리는 일에 계속해서 힘써 왔다. 그의 가장 알려진 책 『최상의 주님께 나의 최선을 드립니다』는 영국에서 1927년 출간된 이래 수백만 권이 팔리면서 이제는 기독교고전이 되었다.
▣ 역자 스데반 황
미국 필라 웨스트민스터 목회학 석사와 펜실베니아 비블리컬 신학 석사를 받았고 필라 KITE 구약학 교수를 역임했다. 미국에서 7년간 청년 및 유학생 중심으로 목회를 했고, 지금은 오스왈드 챔버스를 한국에 알리는 소명을 받고 토기장이와 함께 이 사역을 위해 수고하고 있다.
▣ Short Summary
이 책은 세상에 곁눈질하는 그리스도인을 향한 오스왈드 챔버스의 일침이다. 산상수훈은 하나님의 영적 폭약이고 예수님의 혁명적인 가르침이다. 그렇기에 결코 지킬 수 없는, 절망과 좌절만 안겨주는 메시지이기도 하다. 그러나 거듭나고 성령 받은 그리스도인이라면 주의 능력과 은혜로 능히 지킬 수 있고, 응당 순종해야 할 말씀이다. 오스왈드 챔버스가 처음부터 끝까지 줄곧 강조하는 것은 ‘순종의 삶’이다. 거듭나고 성령 받으면 기질과 성향이 바뀌어 산상수훈대로 살게 된다는 것이다. 순종하는 순간, 우리의 기질은 바뀌게 된다. 가짜 그리스도인이 만연한 세상에서 그가 전하는 산상수훈은 진짜 그리스도인의 삶이 무엇인지 일깨워준다. 산상수훈은 만만치 않은, 무서운 말씀이다. 그러나 순종하면 엄청난 영적 축복을 누릴 것이다.
▣ 차례
1부 성령께서 주관하시는 순종의 삶
2부 보이는 현실과 보이지 않는 실제가 조화로운 삶
3부 계시의 세계와 상식의 세계를 아우르는 삶
4부 지속적인 행동으로 성품을 빚어가는 삶
5부 이상과 현실이 소망스럽게 하나되는 삶
1부 성령께서 주관하시는 순종의 삶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 5:3).
산상수훈의 이 말씀은 천국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우리는 가난하다는 것을 깨닫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러나 우리 자신의 가난함을 깨달을 때에야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께서 역사하시는 영적 전방에 도착한 것이다.
산상수훈을 처음 읽을 때는 그 내용이 매우 간단하고 평이하며 별로 깜짝 놀랄 만한 주장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거부감 없이 그 내용들을 우리의 무의식 영역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실제로 그 말씀들은 무의식 영역 속에서 터질 수 있는 영적인 폭약들이다. 성령께서는 필요한 상황이 되면 다시 그 말씀들을 우리 의식의 영역으로 옮겨놓으시는데, 그때 우리는 그 말씀들이 얼마나 엄청난 내용들인지 깨닫게 된다. 그것은 성령의 폭약을 담고 있어서 우리 삶의 상황이 이 폭약을 필요로 할 경우 영적인 폭탄처럼 터진다. 그래서 우리의 모든 개념들을 터뜨리고 무너뜨려 우리 삶에 대변혁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산상수훈의 내용은 문자적으로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진리가 마음속 의식의 영역으로 옮겨졌을 때 우리가 그 빛에 순종할 것인가 말 것인가이다. 오히려 하나님의 생명이 거듭남에 의해 우리 안에 침투할 수 있도록 우리가 허락하는가 안 하는가의 문제라는 것이다. 만일 거듭나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있으면, 그때 우리의 마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젖어들고 그 가르침은 우리의 무의식 영역으로 깊이 들어간다.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고후 4:11). 예수님은 우리의 성향 자체가 그 근본까지, 곧 우리의 의식적인 동기뿐 아니라 무의식적인 동기까지 의로워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우리의 존재 자체를 넘어서는 영역을 다루고자 하시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나의 마음을 그처럼 순결하게 하실 수 있는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 그분은 하실 수 있다! 주께서 나의 성향을 바꾸셨기에 어떤 상황 가운데 처하게 되면 내가 나 자신에게 놀랄 정도로 신기하게 변화된 자신을 발견한다. 주님은 내 안에 주님의 속성을 부여하셔서 나의 속성과 주님의 속성이 정확하게 일치되도록 하실 수 있다. 이것이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의미이다.
“내가 온 것은… 완전하게 하려 함이로다.” 이 얼마나 엄청난 말씀인가! 우리는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 때 우리의 신을 벗어야 하고 상식적인 생각을 다 내려놓아야 한다. “은혜 아래 있고 법 아래 있지 않다”는 말씀은 우리가 원하는 대로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니다. 우리는 얼마나 쉽게 한두 가지의 신앙적인 말들을 만들어놓고 지나칠 정도로 그 말을 되풀이하는 가운데 자신들을 속여 예수 그리스도의 법칙에서 벗어나게 되는지 모른다. 이러한 영적 속임수를 막는 유일한 방어책은 하나님과 깊은 인격적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모든 영적 깨달음의 비결은 빛 가운데 걷는 것이지, 자신의 확신이나 이론을 따르는 것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빛 가운데 걷는 것이 영적 깨달음의 법칙이다.
“너희의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마 5:20). 이 말씀은 우리의 의가 행위에 있어서도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를 능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의로운 행위가 그들의 의로운 행위를 능가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단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씀이다. 중세 시대의 성직자들은 삶의 책임을 버리고 자신들을 세상과 차단시켰다. 그들이 원했던 모든 것은 ‘되는 것’이지 ‘행하는 것’이 아니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도 똑같은 것을 원한다. 그래서 이러저러한 관계들을 다 차단한다. 이러한 경우 그들의 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를 능가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의로운 존재’일 때 우리의 행위도 마땅히 그들의 의로운 행위를 능가해야 한다.
그러므로 산상수훈을 듣고도 절망하지 않는 사람은 아직 주님의 교훈의 의미가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을 마음으로 깨닫게 된다면 곧 이렇게 말하게 될 것이다. “누가 이 교훈대로 행할 수 있단 말인가?” 이러한 절규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이다. 만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대로 마음이 청결한 자가 그 교훈대로 행할 수 있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마음이 청결할 수 있겠는가? 주께서 말씀하신다. “내게로 오라.”
2부 보이는 현실과 보이지 않는 실제가 조화로운 삶
성경은 전 우주적인 계시이지만 사람이 위로부터 거듭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알 수 없다. ‘현실적 actual’이라는 것은 우리의 감각으로 접하는 것들을 뜻한다. ‘실제적 real’이라는 것은 우리의 감각으로 접할 수 없는 것이지만 어딘가에 항상 있는 것이다. 광신자들은 보이지 않는 실제만을 위해 보이는 현실을 무시한다. 유물론자들은 보이는 현실만 보고 보이지 않는 실제를 무시한다. 이 땅을 걸으셨던 분 중에 유일하게 완전한 조화로움을 가지셨던 분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였다. 왜냐하면 그분 안에서 현실과 실제는 하나였기 때문이다. 예수 안에서 거듭날 때 우리는 실제 세계의 빛 가운데서 현실 세계를 보기 시작한다. 우리는 기도가 현실을 바꾼다고 말하지만, 정확히 말해 기도는 ‘현실’을 바꾸기보다 현실을 바라보는 ‘사람’을 바꾼다.
1. 유혹과 시험을 이겨 마음을 청결하게 하신다
산상수훈을 통해 주님께서는 현실과 실제를 함께 다루신다. 주님은 우리가 주님을 따르고 성령에 순종한다면 청결한 삶을 살게 될 것이라는 원칙을 알려주신다. 그 누구도 율법을 지킴으로써 자신을 청결하게 할 수 없다. 청결은 ‘무엇을’ 옳게 행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마음을 옳게 하느냐의 문제이다. 청결은 너무나 깊어 사람이 자연스럽게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청결을 공개적으로 유일하게 보여주는 것은 주님의 마음속에 있는 청결이다. 그것이 바로 주께서 우리 안에 심으시는 청결이다. 주님은 우리가 드러내는 마음의 기질에 의해 우리가 그 청결을 소유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변화된 마음의 기질은 과거에 음욕과 욕망을 불러일으켰던 것들에 대해 더 이상 반응하지 않는다. 이는 마음뿐 아니라 행동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이것이 청결한 자를 알아볼 수 있는 비결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의 성향을 바꾸신다면 훈련의 필요는 없다는 말일까? 예수님께서는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는 엄격한 훈련의 말씀을 하신다. 훈련이 필요한 이유는 우리의 몸이 잘못된 성향에 의해 사용되어왔기 때문이다. 당신 안에 최선이 아닌 ‘옳은 것들’을 단호히 엄격하게 다뤄라. 모든 사람에게 있어서 “차선은 최선의 원수”라는 말이 있다. 차선은 좋은 것이지만 충분히 좋은 것은 아니다. 당신의 ‘오른손’은 나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만일 그것이 당신의 영적인 삶의 진보와 예수님의 교훈을 따르는 것을 방해한다면 잘라버리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왜 일상적인 것을 영적인 것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이처럼 희생제물을 원하셨을까? 하나님께서 그렇게 강요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질서는 우리가 순종에 의해 영적인 삶을 살게 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죄 때문에 그 자연스러운 것이 희생제물이 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만일 당신이 희생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한다면 영적인 것을 포기해야 한다. 이는 처벌이 아니라 영적인 원칙일 뿐이다.
이 세상에 그리스도인의 삶보다 더 영웅적이고 장엄한 것은 없다. 영성은 나쁜 사람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 사람들의 경건을 부추기는 그런 것이 아니다. 영성은 힘의 개념이다. 아주 강력한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했기에 힘이 있는 것이다. 주님 말씀에 순종하면 주께서는 가장 타락하고 변질되고 죄로 가득 찬 생명을 영적으로 만드실 것이다. 순결은 강하고 정열적인 것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순결하려고 하는 자들마다 영광스러울 정도로 뛰어난 일들을 하게 된다.
2. 훈련된 힘으로 충동을 다스리고 선한 습관을 만든다
습관은 연습의 결과이다. 계속적으로 뭔가를 하여 자신의 두 번째 속성으로 삼는 것이다. 사람의 차등이란 개인적인 능력의 차이를 의미하기보다 훈련의 차이로 보아야 할 것이다. 충동적인 사람은 전혀 훈련이 안 되어 있는 사람이다. 우리는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우리의 습관을 형성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곧 하나님의 능력과 우리의 연습이 함께 가야 한다. 우리가 영적인 삶에 있어서 실패하는 이유는 연습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의 본성의 물리적인 부분이 하나님의 능력을 사용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계속 연습하면 우리가 연습하는 것이 우리의 둘째 속성이 될 것이다. 그래서 위기가 올 때,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와 함께할 뿐 아니라 우리의 본성도 함께하여 그 위기를 이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결혼’과 ‘돈’은 개인의 삶과 이 사회를 형성하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이것들은 실체의 시금석이기 때문에 이 둘과 관련해 성령께서 언제나 역사하신다. 우리가 하는 ‘말’ 또한 마찬가지다. 말을 아끼고 오직 진실한 말을 통해 당신의 진심만 알려라. 주의 생명이 우리 안에 들어오면 주께서는 우리를 자신에 대해서는 정직하게 만드시고 다른 사람들을 향해서는 관용하며 친절하게 만드신다.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에 부합하는 말만 하다 보면 천천히 그러나 분명히 당신의 말과 진심이 하나가 될 것이다. 주님께서는 망령된 종교적 상투어 곧 가장 깊은 경외심을 가지고 다루어야 할 것들을 경박스럽게 말하는 것을 금하신다. 사람에게 진실이 하나님께도 진실이라는 것을 깨닫고 단순하고 진실하게 말하라. 당신에 대해 비방이 떠돌 때는 옷에 묻은 진흙처럼 다뤄라. 젖어 있는 동안에 해결하려 하면 그 진흙은 옷에 다 묻게 되나, 마를 때까지 내버려두면 툭하고 털어 낼 수 있다.
3. 피할 수 없는 박해라면 지혜롭게 대처한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당신의 오른편 뺨을 치면 신경을 쓰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를 대표하는 자로서 왼편도 돌려대라고 말씀하신다. 상식적으로 볼 때는 당신이 되받아 치지 않으면 겁쟁이이기 때문이나, 초자연적으로 볼 때는 당신 안에 계시는 하나님의 아들이 드러나는 것이다. 성도는 세상의 눈으로 볼 때 멸시받을 만한 온유함을 보인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엄청난 모욕을 당하게 된다. 이때 이 모욕을 이기는 힘은 우리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의 힘이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박히셨으나(고후 13:4). 주님의 조언은, 당신이 개인적인 모욕을 받게 되면 그것 때문에 분노하지 말아야 할 뿐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아들을 드러내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강탈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만일 사람들이 당신으로부터 뭔가 강탈하려고 하면 그로 하여금 가져가게 하고 당신은 계속 당신의 일을 하라는 말씀이다. 당신이 주님의 제자라면 자신을 위해 싸울 시간이 없을 것이다. 절대로 당신의 권리를 주장하지 말라.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때마다 하나님의 아들에게 고통을 준다. 그러나 만일 내가 권리를 포기하고 나 자신을 아프게 하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 고통 당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이렇게 악에게 이기는 것이 당신의 의무요, 당신 안에 계신 하나님의 아들만이 이 일을 하실 수 있다.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예수님의 자선에 대한 말씀은 자선에 대한 우리의 개념에 근본적인 혁명을 일으킨다. 이 세상의 지성인들은 이 사람들이 자선을 받을 자격이 있나요?하고 따진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순간 하나님의 성령은 말씀하신다. 너는 누구냐? 너는 다른 사람들보다 네가 누리는 복들을 누릴 자격이 되느냐? 그리스도인들이 이 구절의 의미를 교묘하게 바꾸고 타협하는 이유는 하늘 아버지의 완전한 섭리를 불신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순종해 보라.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에 순종한 사람은 자신에게 찾아와 구하는 사람도 하나님의 강권에 의해 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성령께서 이 말씀을 우리의 상황에 적용하시도록 맡기면 우리는 우리를 강권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발견하게 되며 우리가 순종할 때,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완전한 섭리의 역사를 보게 될 것이다.
3부 계시의 세계와 상식의 세계를 아우르는 삶
우리는 두 세계에서 산다. 우리의 감각으로 접하는 상식의 세계와 믿음으로 접하는 계시의 세계이다. 하나님의 지혜는 정확하게 이 두 세계에 잘 어울리며 한 세계가 다른 세계를 해석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지혜의 표현이다. 예수 안에서 우리는 계시의 세계와 상식의 세계가 하나 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상식의 세계에서 필요한 기능은 지적 호기심이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께서 거하시는 계시의 영역으로 들어가면 오히려 지적 호기심은 배제되고 의지적인 순종이 가장 중요하게 된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알리라”(요 7:17). 이 말씀은 우리가 태어나야만 생명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는 것처럼, 구원을 받아야만 구속을 이해할 수 있듯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할 때에만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1. 내 마음에 거슬려도 주님을 사랑하고 본받는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해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우리에게 원수가 없을 때, 우리를 저주하는 자도 없고 모욕하는 자도 없을 때는 이 말씀들을 받아들이기가 쉬울 것이다. 그러나 만일 누군가 당신을 비방하고 괴롭히며 나아가 계획적으로 망하게 하려고 할 때, “원수를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당신은 순종하겠는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내면을 재창조하지 않으시면 주님의 가르치심은 인간의 귀로 들을 수 있는 가장 큰 우롱이 될 것이며, 산상수훈은 단지 이상에 불과할 것이다.
산상수훈이 우리를 절망으로 찢어놓는다면, 이는 예수님께서 정확하게 의도한 바이다. 곧 우리가 원수를 사랑할 수 없고 우리를 저주하는 자를 축복할 수 없으며 산상수훈에서 계시된 기준의 근처에도 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을 때,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주님의 성향을 받을 준비가 될 것이다. 주님의 성향을 받게 되면 원수를 사랑할 수 있고, 우리에게 심술궂게 행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게 되며, 우리를 미워하는 자들을 선대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명령들은 일반인들에게는 완전히 불가능한 것들이다. 물론 잠시 억지로 지켜지는 것처럼 보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성령 하나님에 의해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온전한 의미에서 이 명령을 절대로 지킬 수 없다. 당신이 당신의 원수를 사랑한다면 당신이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엄청난 일을 이루셨다는 것이고, 당신을 보는 모든 사람들도 이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의 선행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이 찍혀야 하고 하나님께서 쓰신 편지로 사람들에게 읽혀야 한다. 따라서 우리의 선행은 처음부터 끝까지 초자연적인 것이어야 한다. 우리가 거듭났다는 증거는 우리가 아주 시끄럽고 복잡하고 억울한 일들을 접하게 되었을 때 그럼에도 그 모든 중심에서 조금도 요동 없이 온전한 평강을 누릴 수 있는 능력이 생겼다는 사실에서 나타난다. 그리고 이 초자연적인 평강은 초자연적인 선행을 부른다. 물론 이것은 전에는 우리에게 없었던 것으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해서만 설명될 수 있는 능력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비결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초자연적인 것을 구체적인 현실의 삶 속에서 자연스럽게 만드는 것이다.
만일 우리의 관심이 남들에게 착하게 보이는 데 초점을 맞추게 되면 우리는 곧 영적인 삶에 있어서 메마르게 될 것이다. 우리의 모든 의는 “더러운 옷 같다”(사 64:6). 오직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과 연합될 때 그분의 불꽃같은 거룩이 우리의 것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오직 첫째도 예수님, 둘째도 예수님, 셋째도 예수님만 바라보아야 한다. 그때 사람들은 우리의 겉모습을 보고 매우 착하다고 말하는 대신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놀라운 일을 하셨다고 말하게 될 것이다.
2. 내 초점이 아닌 하나님께 맞춘다
구제할 때 우리는 수백 개의 동기를 섞으나, 예수 그리스도는 구제의 동기가 오직 단 한 가지여야 한다고 가르치신다. 바로 당신의 눈을 하나님께 두는 것이다.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주님은 남을 구제하는 것이 무의식적으로 되어 당신이 착한 일을 하고 있는 것을 모를 정도로 구제하라고 말씀하신다. 구제 행위는 하나님과 나의 관계를 나타낼 수 있는 성령께서 주신 기회이다. 이 사실을 깨닫는 자가 얼마나 희귀한지!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갖는 습관을 가지면 선행을 행하는 데 있어서 더 이상 당신 자신의 판단이나 즉흥적인 감정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성령의 인도하심만 신뢰하게 될 것이다.
기도할 때 하나님을 알기 위한 것 외에 다른 동기가 있는가?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이러한 기도의 축복을 놓치지 말기 바란다. 아무도 당신이 기도하는 것을 모르지만 그 보상은 분명하고 놀라운 축복으로 다가올 것이다. 하나님과 계속 동행하면 당신의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더욱 깊고 비밀스러운 관계를 유지하는 비결을 점점 더 배우게 될 것이다. 또한 누군가를 위해 기도를 드리면 우리의 열정이 아닌 성령의 열정이 그 영혼을 위해 일하게 된다. 우리가 기도하는 대상이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그를 위해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기회를 드리는 것이다.
금식할 때, 사람들 앞에서 하지 말고 은밀한 중에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라.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만일 하나님과의 동행을 더 깊게 하기 위해 금식 훈련을 하고 있다고 다른 사람에게 말하면 그 순간부터 그 훈련은 아무 효력이 없게 된다. 주님은 우리가 금식할 때 우리의 가장 가까운 사람마저 알아차릴 수 없을 만큼 당신과 하나님만의 관계가 되도록 하라고 권면하신다. 그 누구도 하늘로부터 거듭나지 않으면 한 가지 동기만을 가질 수 없다. 주의 영이 누군가에게 임할 때 성령께서 가장 먼저 하시는 일은 그 사람에게 한 가지 동기를 주시는 것이요 하나님의 영광만 보는 성한 눈을 주시는 것이다.
3. 성령의 도움 없이 생각하고 행하던 일상을 바꾼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재물과 돈, 그리고 이 땅에 속한 모든 물질적인 것들을 다룰 때 우리의 생각을 하나님의 생각에 맞추라고 가르치신다. “오직 너희를 위해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상식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에 확신을 두라는 말이다. 당신이 매번 믿음을 가지고 앞으로 나아갈 때마다 당신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믿음대로 행하실 것으로 생각했으나 오히려 현실의 삶은 정반대로 진행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바로 이때 상식을 의지하기보다 하나님께 확신을 두고 그 믿음의 시련을 통과해야 한다. 그러면 당신은 하늘의 은행계좌에 많은 부를 쌓게 될 것이며, 더 많은 믿음의 시련을 지날수록 당신의 하늘 구좌는 점점 풍요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마침내 당신은 기쁨으로 고난을 통과할 수 있게 되고, 주변 사람들은 당신의 엄청난 믿음의 부요함이 어디서 왔는지 의아해할 것이다.
평범한 삶은 그 자체가 죄악된 것은 아니나 그 평범한 삶을 주관하는 마음속 성향은 죄악으로 가득하다. 오직 하나님께서 그 성향을 바꾸실 때에만 우리는 꾸준하게 하나님께 순종하는 과정을 통해 우리의 평범한 삶을 영적인 삶으로 바꾸어낼 수 있다. 당신이 하나님께 집중하기 시작하면 다른 사람에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일인데도 당신이 해서는 안 될 일이 많아지게 된다. 그러나 이때 그 일을 행하는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대인관계를 잘 유지하되 당신 자신은 하나님께 집중하도록 노력하라. 자신의 확신이나 관점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집중해야 한다. 뭔가에 대해 의심이 생기면 성경적 사고로 이치를 따져보라. “이것은 주님께서 추구하는 것인가, 아니면 사탄이 추구하는 것인가?” 당신의 결정이 내려지면 그대로 행하라.
어둠은 나의 관점이요 권리 주장이다. 빛은 하나님의 관점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빛과 어둠 사이를 아주 명확하게 구분하셨다. 위험은 그 선이 흐려지는 데 있다. 이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요 3:19).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약 4:4).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분리에 대한 교훈은 주님께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신 주제이며 주님의 가르치심 가운데 계속 흐르고 있다.
우리의 영적인 삶의 초기에는 극단이 있을 가능성이 있다. 이렇게 되는 것은 우연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그렇게 정하셨다. 곧 영적인 삶의 초기에는 과거 세상에 속한 삶과는 완전히 다른 극단적인 삶으로 가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과거의 옛 삶을 단계적으로 청산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아주 과감히 당장 청산하게 하신다. 그 후 우리가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에 있게 되면 다시 우리를 세상으로 보내신다. 그래서 세상은 우리를 다시 보지만, 우리는 그 안에 속하지 않게 된다. 우리가 주님을 온전히 닮아 영적으로 장성한 사람이 되면 하나님께서는 주님의 멍에를 우리의 어깨 위에 맡기시고 세상과 육체와 사탄이 우리를 시험하는 곳으로 인도하신다. 이때 하나님께서 이미 아시는 것은, “너희 안에 계신 자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심이라”(요일 4:4)는 사실이다.
4부 지속적인 행동으로 성품을 빚어가는 삶
1. 나를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생수의 강이 흐르게 한다
예수님께서는 주의 제자로서 판단하지 않는 기질을 개발하라고 말씀하신다. 영적인 영역에서 볼 때 비판은 사랑이 변해 썩은 사랑이 된 것이다. 건강한 영적인 삶에는 비판의 여지가 없다. 비판은 지적 기능이지 도덕적 기능이 아니다. 만일 비판하는 것이 습관이 되면 마침내 삶의 도덕적 기능은 파괴될 것이다. 비판은 사람의 힘을 집중하지 못하도록 하고 무엇인가 해낼 수 있는 힘을 막는 치명적인 결과를 낳는다. 이러한 일은 결단코 성령의 일일 수 없다. 성령만이 비판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시다. 그분은 가해 및 상처를 주지 않고도 무엇이 그른 것인가를 보여줄 수 있는 분이시다. 그분께서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때는 기도하게 하기 위함이지 비판하게 하기 위함이 아니다.
만일 내가 다른 형제의 눈의 티를 본다면 이는 사실 내 안에 들보가 있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내 눈 안에 있는 들보를 제거해 주셔서 우리의 눈이 밝히 보게 된다면, 나를 위해 해주신 일을 다른 사람을 위해서도 쉽게 하실 것이라는 분명한 확신이 서게 된다. 왜냐하면 나는 들보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 사람은 기껏해야 티만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이 우리에게 주는 확신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나를 변화시켰다는 사실로 인해 너무 놀라게 되고 동시에 그 어떤 사람에게도 실망하지 않을 수 있다.
2. 하나님의 말씀에 물도 타지 않고 진흙도 묻히지 않는다
사람들은 계속 하나님의 말씀을 물을 탄 것처럼 묽게 해서 세속적인 것에 맞추어간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의 말씀이 돼지의 발 아래 짓밟히게 된다. 또한 진리의 한 부분을 진리의 전부인 것으로 취하면 우리는 주님이신 예수님 대신에 어떤 종교 개념을 옹호하는 자가 된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대신에 기독교 교리에만 충실하면 우리는 우리의 집을 ‘개념’이라는 큰 망치로 때리는 것과 같다. 우리가 온전히 예수 그리스도를 따를 때, 비로소 우리의 주장하는 자세와 독단적인 모습은 사라지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드러내려는, 예수님께만 집중하는 자세가 나타나게 된다. 그러므로 믿지 않는 자들에게 가장 중요하게 선포해야 하는 것은 교리도, 체험도, 성화도, 재림도 아니다. 중심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다.
3. 전 인격이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 가운데 사로잡힌다
구원은 청결한 마음, 새롭게 된 심령, 하나님과 온전한 영적 관계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전 인격이 하나님의 은혜와 놀라운 능력 가운데 사로잡히는 것이다. 그래서 몸과 혼과 영이 주 예수 그리스도께 매혹되어 사로잡히는 것이다.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엡 5:9). “누구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다른 사람에게서 의를 찾으려고 하지 말고 계속 당신 자신이 착하고 의로울 수 있도록 하라. 우리는 언제나 이 세상에서 공의를 구하지만 공의 같은 것은 이 세상에 없다. 예수님께서는 “결코 너를 위해 공의를 구하지 말고, 절대로 언제나 다른 사람에게 공의를 행하는 것을 멈추지 않도록 하라”고 말씀하셨다.
주님의 가르침의 전반적인 특징은 불가능한 것을 가르치신다는 것이고, 따라서 주께서 우리를 근본적으로 재창조해야 하고 이를 위해 주께서 오셨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삶 가운데 위대한 율법들이 실현될 수 있게 하기 위해 오셨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기적이다. 성경은 어떤 이유에서든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서 은혜로운 삶을 살지 못하는 사람을 허용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분의 구속에 의해 우리의 현실적인 삶이 우리의 신앙 고백과 일치되게 할 수 있으시다. 산상수훈 연구를 통해 볼 때, 이는 마치 빛 세례를 받은 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을 자신의 형질까지 깊게 적시는 듯한 모습이다.
5부 이상과 현실이 소망스럽게 하나되는 삶
삶에 대한 책을 읽을 때 당신은 삶에 대한 개념이 생기며 삶은 아주 단순해 보인다. 그러나 당신이 현실적으로 삶의 사건들을 경험해보면 책에서 알려준 것처럼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개념이란 탐조등과 같아서 어떤 부분을 비쳐주지만 더 이상은 비쳐주지 못한다. 반면 일광은 탐조등이 보여준 것보다 수백 수천의 것들을 더 보여준다. 이와 같이 개념은 뭔가에 대해 제한을 두는 것이고, 개념은 제한을 강요한다.
이상이란 우리의 최상의 개념들을 구축한 것이다. 그러나 도덕적 측면이 있는 것은 아니다. 산상수훈을 단순한 이상으로 대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산상수훈은 이상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향이 그리스도인의 삶을 통해 나타난 것을 언급한 것이다. 사람은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지 못했을 때 부끄러움을 느낀다. 이상이 더 온전할수록 그 사람의 갈등은 더 고통스럽다. 그들은 “내가 비록 그 이상들을 현실 속에서 이루지 못할지라도 나는 내 이상을 절대로 낮출 수 없다”고 말한다. 자신이 이루어낼 수 없는 이상을 가진 사람처럼 고통스러운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사람에게 말씀하신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주께서는 그 사람과 함께하여 그 사람 속에 뭔가를 넣어주어 그의 이상과 현실이 하나가 되게 해주시겠다는 것이다.
1. 날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쓴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자신의 힘으로 자신을 실현해보겠다는 길은 넓다. 그러나 영원한 구원의 인격적인 지식을 깨닫는 유일한 길은 좁고 협착하다. 예수 그리스도 없이는 이상과 현실 사이에 건널 수 없는 간격이 있다. 그 간격을 없앨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예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해 우리 안에 능력과 생명을 넣어주시고 성령으로 우리를 충만케 하신다. 그러나 그 생명과 능력이 현실 속에 나타나도록 해야 하는 것은 우리의 책임이다. 바울은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고 말했다. 이 말은 당신이 구원을 얻기 위해 수고하라는 뜻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구원을 밖으로 나타내라는 것이다. 그러한 수고를 하게 되면서 우리는 제자의 고결한 삶을 사는 것은 어렵지만 영광스럽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주를 위해 당신의 삶을 의도적으로 내려놓으라.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주의 뜻대로 행할 수 있도록 우리 안에서 역사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오직 우리의 할 일은 ‘순종’이다. 놀라운 것은, 주께서 명령하신 것을 순종하기 시작할 때 우리는 우리가 순종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이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 14:15).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으로 제자를 시험하신다. 절대로 “나는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라. 우리가 받은 그 구원에 합당한 존재가 되는 것은 거룩한 과정이며 또한 어려운 과정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지금도 “많은 아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히 2:10)을 하고 계신다.
2. 경건의 겉치레에 속지 말고 삶의 열매를 본다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예수님께서는 삶의 열매를 보라고 하신다.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 겉치레를 하는 것은 놀라울 정도로 쉽다. 우리의 눈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벗어나기만 하면 우리에게도 경건의 겉치레가 바로 따라온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공적으로 드러나는 부분으로 사람을 시험한다. 주님도 대부분의 삶을 공적으로 사셨다. 오늘날 성도들은 공적으로 주님의 증인이 되는 것을 싫어하지만, 사람들이 실제로 자신들이 누구인가를 숨길 수 없도록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법칙이다.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마 10:26).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마 10:16). 주님은 주님의 제자로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 사람은 결국 주님의 원수로 드러날 것이라고 경고하셨다. 바울은 성화와 음란을 짝지어 말한다. 이 뜻은 모든 종류의 고상한 영적 감정이 정상적으로 삶을 통해 표현되지 않으면 잘못된 차원에서 반응하게 된다는 뜻이다. 자연 세계에서도 사람이 건강하기 위해서는 외부와 접할 필요가 있는 것처럼,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의 영적 세계에서 공적이면서 외부적으로 열린 부분은 성경이다. 우리가 성경의 세계에서 살면 우리의 뿌리는 건강하고 우리의 삶은 올바르게 된다.
3. 오늘도 주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행한다
우리는 세 가지 풍랑에 의해 시험을 받을 것이다. 비, 창수, 바람이다. 이는 세상과 육체와 사탄이다. 이 시험을 지날 때 오직 예수님의 말씀 위에 세워진 도성들만 반석같이 서게 될 것이다. 예수님은 말씀의 ‘위’가 아니라 말씀의 ‘옆’에 세워진 영적 구조들은 어리석은 사람들이 세운 건물이라고 말씀하신다. 사람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지적으로만 이해하고 순종은 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많다. 이렇게 세운 모든 것은 예수님의 말씀의 기초 ‘위에’ 세운 것이 아니라 ‘옆에’ 세우는 것으로서 시험이 올 때 무너진다. 우리가 세운 모든 것들은 마침내 최종적으로 시험을 받게 될 것이다. 이때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서 있지 않은 모든 것들은 말로 다할 수 없는 무서운 재난에 빠지게 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갖고 그 길에서 걷기 시작할 때 우리는 자신을 변호하려는 마음이 사라지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오직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이루려는 마음만이 빛 가운데 드러나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가 잘하고 있다고 인정하는 한,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다. 이러한 자에게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니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마 25: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