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 - 미루어진 기쁨
낸시 거스리 지음/ 사랑플러스 편집부 옮김
▣ 저자 낸시 거스리
낸시 거스리(Nancy Guthrie)는 18년간 틴데일 등 미국 굴지의 기독 출판계에서 편집 프로젝트와 미디어에 관련된 일을 해 왔으며, 맥스 루케이도, 앤 그레이엄 로츠 등 세계적인 작가들의 글을 담당해 편집해 온 바 있다. 남편 데이비드와 아들 매트와 함께 테네시 주 네슈빌 시에 살고 있다.
▣ Short Summary
이 책은 저자 낸시 거스리가 희귀병으로 두 아이를 연달아 잃는 고통 중에서 하나님에게로 더 가까이 가는 여정을 담은, 그녀의 살아 있는 라이프 스토리이다.
낸시 거스리는 호프(Hope)라는 딸을 낳는다. 하지만 태어난 지 이틀이 되던 날, 호프는 젤웨거증후군을 가지고 태어났음이 밝혀지고, 이 아이는 서서히 죽어갈 것임을 통보 받는다. 거스리 부부는 6개월만에 눈물로 딸아이를 먼저 보내고, 자신들의 유전인자에 문제가 있어 그들이 낳는 아기 중 25퍼센트는 호프처럼 젤웨거증후군을 가지고 태어날 수밖에 없음을 알게 된다. 그래서 그의 남편 데이비드는 정관절제 수술을 받았으나 이 시도는 실패했다. 그녀는 또 임신을 하게 되었고, 10개월 후 호프와 같은 병을 가진 남자아이, 가브리엘이 태어났으나, 이 아이도 곧이어 죽었다.
낸시는 자신에게 주어진 고통을 이기기 위해, 이 과정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욥의 인생을 따라간다. 세상에 욥보다 더한 고통을 겪은 이는 없을 것이다. 그녀는 욥기를 묵상하면서, 욥이 자신의 고통 속에서 가졌던 하나님과의 관계를 좇아간다. 욥이 자신의 극한 고통을 이기기 위해 걸어간 인생의 징검다리를 함께 디디며, 욥이 깨달은 하나님의 비밀을 발견한다.
▣ 차례
프롤로그
상실 / 눈물 / 예배 / 감사 / 원망 / 고통 / 절망 / 왜? / 영원 / 위로자 / 비밀 / 순종 / 친밀
에필로그
하나님께로 가는 징검돌
프롤로그
어느 토요일 아침, 이웃집이 모두 불타버리는 사건을 보면서 한 이야기가 떠올랐다. 큰 상실을 경험한 한 사람에 관한 이야기다. 그가 잃은 것은 너무도 크고 흔치 않아 사람들이 상상하기조차 힘들다. 오래 전에 살았던 욥이라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인데, 아마도 그는 역사상 가장 큰 고통을 겪은 사람일 것이다.
욥의 이야기를 읽을 때, 나는 욥이 자신의 고통과 상실에 대해 보인 반응에 매우 놀랐다. 그리고 욥은 그런 큰 고통을 겪기 위해 특별하게 선택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욥은 결코 고통을 받을 만한 죄를 지어서 벌을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확고한 신앙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고통을 받았던 것이다. 나는 내 자신의 믿음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나는 과연 욥과 같이 이유도 모를 그런 고난과 시련 속에서도 꿋꿋할 수 있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가? 모든 희망이 다 사라졌을 때 마지막까지 남을 그런 믿음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고통을 당하기 전의 이야기이다. 바로 내 인생의 모든 것을 바꾸어 버린 참혹한 소식을 접하게 되기 전, 고통스러운 죽음을 예감하기 전, 호프가 태어나기 전의 이야기이다.
상실
이웃집에 불이 난 지 2주 후, 나는 딸을 낳았다. 남편과 나는 그 애에게 몇 년 전부터 생각해 온 호프(Hope)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우리는 그 이름이 그렇게 큰 의미가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딸이 태어나자마자 의사는 몇 가지 문제들이 있다고 했다. 내 딸 호프는 내반족증(발이 뒤틀리는 병)으로 몸에 힘이 없었으며 외부의 자극에 둔감했다. 호프는 젖을 잘 빨지도 못했고, 두 손도 바깥쪽으로 뒤틀려 있었다. 호프를 검진한 유전학자는 그 애가 신진대사 장애를 일으키는 젤웨거 증후군을 가지고 태어났으며, 그로 인해 6개월 안에 죽게 될 것이라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했다. 치료법도 없어서 회복이 불가능하며, 생존자는 한 명도 없었다고 했다.
나는 남편과 함께 천천히 딸아이의 병실로 걸어갔고, 우리는 울고 또 울며 하나님을 불렀다. 나는 이 엄청난 실망과 슬픔에 어떻게 반응할지 선택해야만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 딸이 우리와 함께 있을 수 있는 시간이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나는 욥의 이야기를 다시 생각해 보았다. 욥이 자신의 모든 것을 잃었을 때 어떻게 반응했는지 좀더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 짧은 옛날이야기를 통해, 세상이 무너져 내릴 것 같은 고통 속에서 신앙인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보려고 한다. 욥은 대단한 신앙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악을 멀리하는, 동방의 의인이었다. 그러나 사탄은 하나님을 향한 욥의 신앙을 믿지 않았다. 욥으로부터 인생의 안락함을 빼앗는다면 하나님으로부터 등을 돌릴 것이라고 했다. 그때 하나님은 사탄에게 욥을 시험하도록 허락하셨다. 이 내용은 우리가 듣고 싶지 않은 내용이다. 그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사랑의 하나님과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왜 하나님은 사탄이 우리 인생에 그렇게 많은 고통을 주도록 허락하실까?
그러나 이 ‘왜?’라는 질문에 답하기 전에 사랑하는 사람과 모든 것을 잃은 욥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먼저 살펴보자. 욥의 이야기는 그의 고통에 관해서뿐만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보여 주고 있다. 그는 그에게 닥친 그 고통의 길 한가운데서 전에 알던 것과 전혀 다른 방법으로 하나님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욥의 말년에 하나님께서는 처음보다 더 큰 복을 주시고 욥은 수명을 다해 죽을 때까지 아름다운 일생을 보냈다.
바로 이런 것이 당신과 내가 원하는 것이다. 비록 지금 우리가 고통 중에 있을지라도 고통 이후에 하나님을 새롭게 이해하는 것, 우리가 전혀 보지 못했던 방법으로 하나님을 다시 보는 것, 하나님의 축복으로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것, 그리고 인생을 아름답게 마치는 것이 우리가 원하는 것이 아닐까? 지금부터 욥의 비밀을 밝히기 위해 그의 일생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려고 한다. 그의 고통의 길들을 따라가 보면 욥의 이야기는 우리를 하나님께 좀더 가까이 인도해 줄 것이다.
눈물
남편과 나는 199일을 우리 딸 호프와 같이 보냈다. 우리는 그 아이를 사랑했고 호프와 함께했던 날들은 행복했다. 호프를 묻고 난 다음 날, 남편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난 우리 믿음이 이 고통을 조금은 덜어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전혀 그렇지 않은 것 같아. 우리의 믿음은 호프가 살아 있는 동안 우리가 견딜 수 있도록 커다란 힘과 용기를 주었어. 우리는 호프가 천국에 간 것을 알기에 안심할 수 있지. 그래서 우리를 절망으로부터 구해 주었잖아. 하지만 지금 느끼는 이 고통은 덜어주지 않는 것 같군.”
많은 사람들이 기꺼이 나의 슬픔을 함께하려 했다. 난 정말 축복 받은 사람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슬픔을 빨리 극복하라고 재촉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정말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고 그래서 아프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했다. 내 눈물만이 나의 깊은 슬픔을 덜어 줄 유일한 방법이었다.
우리와 함께 눈물을 흘렸던 사람들은 우리가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우리가 엄청난 슬픔을 짊어지고 살아간다고 느낄 때 우리를 위해 울어 주는 주위 사람들은 마치 양동이 가득 우리의 슬픔을 덜어 가는 것 같았다. 아마도 그것은 누군가가 우리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가장 의미 있는 일이 아닐까 생각된다.
다행히도 우리는 슬픔을 혼자서만 견뎌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이사야 53장 3절에 보면 성경은 하나님의 아들을 ‘슬픔의 사람’ 그리고 ‘슬픔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라고 묘사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슬픔을 통해서 하나님의 성품에서 새로운 면을 발견하게 되고, 상실 없이는 알 수 없는 새로운 관점으로 하나님을 이해하게 된다. 하나님은 슬픔에 대해 잘 아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해하시며, 우리의 슬픔을 빨리 극복하라고 재촉하지 않으신다. 그는 우리와 슬픔을 나누시는 분이시다.
고통을 없애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생각해 버리는 것과 다른 하나는 고통에 정면으로 부딪쳐, 이것을 진리의 빛 가운데 드러내고 세세하게 조사하며 이 고통의 문제를 받아들이면서 점차 나아지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나는 이 두 가지 방법 중 후자를 택했다. 슬픔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슬픔으로 인해 느끼는 감정을 감추지 않는 것이다.
욥은 그에게 닥친 고통에 어떻게 반응했는가? 죽음과 같이 깊은 고통과 상실 속에서 욥은 마음을 감추지 않았다. 오히려 드러내고 슬퍼했다. 그는 자신의 겉옷을 찢고 머리카락을 모두 깎아버렸다. 그는 고통으로 아파했다. 당신은 슬픔으로부터 도망가거나 그저 잊으려 하기보다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절망과 비통의 감정에 맞서며, 하나님의 손이 당신의 마음과 머리를 회복하심을 바라겠는가?
예배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호프가 죽고 나서 가장 가기 힘든 곳은 바로 교회였다. 교회에 갈 때마다 내 안에는 아주 상반된 두 가지 감정이 일어났다. 나는 아무도 호프에 대해서 묻지 않는 것을 참을 수 없었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너무 많은 사람들이 호프에 대해 묻는 것을 견딜 수 없었다. 그러나 내가 교회에 가기 힘들었던 이유는 단지 사람들 때문만은 아니었다. 하나님 때문이기도 했다. 찬양을 할 때, 내 귀에 들려오는 그 가사들은 나를 목메게 했다.
내 평생에 가는 길 순탄하여 늘 잔잔한 강 같든지
큰 풍파로 무섭고 어렵든지 나의 영혼은 늘 편하다.
내 영혼 내 영혼 평안해
하나님께 무조건 감사하고 그를 찬양하는 것이 가끔은 솔직하지 않고 거짓말하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이런 내 모습 때문에 나는 욥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너무나도 놀라곤 한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긴다. 심지어 욥은 모든 희망을 잃고 배신당했다고 느끼는 중에도 하나님 앞에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기로 선택했다. 그것은 바로 전능하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일이었다.
예배는 순종과 관련 있다. 적어도 내게는 그랬다. 내가 순종하기로 결정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내 감정들을 변화시키시고 내가 진심으로 예배 드릴 수 있게 도우셨다. 위기의 한가운데서 멋대로 행동한다면 자기 연민에 빠져 버리게 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 예배 드리면 우리는 우리의 슬픔과 어려운 문제로부터 눈을 돌려 하나님께 집중할 수 있게 된다. 그러면 지금 가지고 있는 어려운 문제들을 좀더 넓은 시각으로 보게 되는 것이다. 고통 중에 마음을 다해 드리는 예배를 통해 우리는 자기 스스로는 아무 능력이 없음을 깨닫게 되며, 오직 하나님의 능력과 풍성하심만이 그 빈자리를 채우시게 된다.
감사
수요일마다 남편 데이비드가 호프를 돌봐주었기 때문에 나는 성경 공부에 참석할 수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이상한 느낌이 들어 남편의 핸드폰으로 전화를 했을 때 남편은 말했다. “지금 진료실에 와 있는데 호프 때문에 온 건 아니야. 매트가 오늘 아침 체육 시간에 넘어져서 앞니가 부러졌어.” 나는 긴 한숨을 내쉬었고 잠시 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순간 남편과 내가 잃을 수 있는 것이 오직 호프뿐이 아닐 수도 있다는 커다란 두려움이 나를 엄습해 왔던 것 같다. 우리는 하나님께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 호프가 우리를 떠난다는 것, 그리고 그 이후에 일어날 많은 가슴 아픈 일들은 모두 받아들일게요. 하지만 우리 아들 매트는 안 돼요. 그리고 우리 부부 중 어느 한 사람도 잃게 하시면 안 되고요. 교통사고도, 암도, 재정 파산도 안 돼요! 아셨죠, 하나님?”
욥은 모든 것을 잃은 상황에서도 땅에 엎드려 하나님께 예배하며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들을 감사했다. 주신 자도 여호와시며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라고 말하는 욥은 자신의 모든 소유가 하나님의 선물임을 알고 있었으며 그것에 집착하지 않고 잊는 법을 깨달았다. 욥은 고통을 당하기 훨씬 전부터 자신은 그저 청지기이며 그의 엄청난 재산과 축복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고 지금도 여전히 하나님의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당신이 가진 모든 것 그리고 당신의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두 하나님의 선물임을 인정할 때 당신은 그 선물을 탐욕스런 마음이 아닌 감사하는 마음으로 소유할 수 있으며 그것을 누릴 수 있다. 하나님이 당신에게 주셨던, 하지만 지금은 가져가신 그 선물에 대해서도 기꺼이 감사할 수 있는가?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돌보실 것이라는 믿음을 갖도록 주님께 도움을 구해 보자. 하나님께서 당신의 소유, 직위, 사랑하는 사람들을 다스리실 것이라 믿으며, “나로 인해 네가 모든 것에서 풍족하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라.
원망
불공평하고 부당한 고통을 당할 때마다 우리는 남에게 책임을 묻는다. 그러나 솔직히 우리가 제일 많이 책임을 묻는 대상은 하나님이다. 고난이 닥칠 때는 누구나 ‘난 이런 고통을 받아야 할 이유가 없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잠깐 멈추어 생각해 보자. 당신이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것들만 받는다면 어떻게 될까?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가 없는 당신의 인생은 어떻게 될까? 욥은 자신에게 편하고 축복 받은 삶을 누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 원망을 돌리는 것을 피했다.
그렇다면 원망은 어디서부터 오는 것인지에 대해 생각해 보자. 죽음, 질병, 파괴 이 모든 것들은 바로 이 세상이 죄로 부패했기 때문에 나타나는 결과들이다. 우리는 지금도 여전히 죄의 저주 아래에 있는 세상에 살고 있으므로 욥과 같은 마음을 갖지 않으면 하나님을 원망하기 쉽다. 욥이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던 이유는 바로 그가 하나님을 경외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우리의 품성과 행위에서 나타난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자기 인생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는 사람이며, 말씀 속에 있는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는 사람이며, 말씀 속에 있는 하나님의 분명한 명령에 순종하는 사람이다. 그의 인생의 모든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며, 이런 사람은 어려움과 씨름할 때일수록 더욱더 하나님을 경외한다.
하나님을 원망하여 지게 된 무거운 짐을 벗고, 또 그 원망 때문에 생긴 슬픔과 낙담, 모든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지 않은가?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영적으로 성장해야 한다. 성경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모든 지혜의 근본이라고 말한다. 큰 그림을 볼 줄 아는 시각을 얻기 원하는가? 그 출발점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건강한 마음을 갖는 것이다.
고통
어느 날 집으로 가는 길에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한 것이 생각난다. ‘만약 이것이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는 것이라면 고통을 겪어도 괜찮습니다.’ 어떤 것인지 잘 알 수는 없지만 하나님이 나를 위해 무언가 준비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만일 그때 그것이 무엇인지 알았다면 물론 나는 그런 기도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느 누구도 고통을 자신의 삶에 즐겨 초대하지 않는다. 하지만 십중팔구 우리의 인생에는 고통이 찾아온다. 주위를 둘러 보라. 인생에서 일어나는 커다란 어려움을 피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가? 그러나 욥에게 고통이 찾아왔을 때, 욥은 오히려 “우리가 하나님께 복도 받았는데 재난을 당하지 말라는 법이 있겠소?”라고 말한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주실 그 모든 것을 기대했다.
하나님이 당신에게 인생의 고통이 오는 것을 허락했다면 그것은 그 고통 속에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선하시고 거룩한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고통을 경험한 후, 그 마음이 더 깊고 아름답게 변화된 사람들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우리가 만나는 고통들에 하나님의 이유와 목적이 숨어 있다는 것을 안다면 우리는 그것을 피하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고통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용기 있는 믿음은 우리를 더 깊은 헌신으로 인도한다.
예수님은 고통을 그저 참는 데 그치지 말고 고통으로부터 배우라고 하신다. 히브리서 5장 7~9절은 내가 너무 힘들고 가장 슬펐을 때 잡고 일어난 말씀이다. 이 말씀을 보면서 하나님의 계획에는 때때로 고통과 죽음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세상을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계획, 즉 당신과 내가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살도록 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에는 그분이 고통 받고 아들이 죽임 당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은 그 계획에 순종하셨지만 그로 인해 고통스러워하셨다. 나는 이 사실에 큰 위로를 받았다. 그분은 하나님 아버지께 울부짖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고 계시는 분이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삶에 그렇게 많은 고통을 허락한 것은 당신이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행동하기까지 당신의 모습을 빚으시기 위함이다. 우리의 성품을 순결하게 하고 우리의 이기심과 죄를 없애려면 고통이 필요하다. 고통은 궁극적으로 우리를 변화시킨다.
고통의 여정 초기에 나는 하나님께 이렇게 말했다. “알았어요, 하나님. 내가 이 일을 꼭 겪어야 한다면, 저에게 지금 모든 것을 보여 주세요. 이 고통을 통해 하나님이 저에게 가르쳐 주시고 싶었던 모든 것을 가르쳐 주세요. 이 믿을 수 없는 고통이 제 인생에서 그냥 낭비되지 않게 해 주세요!”
나는 하나님이 선하신 분임을 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내 고통을 통해서 마침내 내 삶에 선을 이룰 것이라는 걸 안다. 우리를 위해 우리 인생에 좋은 일도 또 나쁜 일도 허락하시는 분임을 알기에 우리는 좋을 때나 슬플 때나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다.
절망
옛말에 설상가상이라는 말이 있다. 호프가 태어난 뒤 남편과 나는 어려운 결정을 내렸다. 우리 부부는 유전인자에 문제가 있어, 둘 다 피임을 위한 의학적 수술을 받았다. 그러나 이 시도는 실패했고 나는 또 임신을 하게 되었다. 이 놀라운 사실 앞에 우리 부부는 복잡한 감정에 휩싸였다.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 그리고 또 다른 아이를 잃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너무나 두려워졌다.
여러 가지 태아 검사를 거치고 우리 부부는 또 다시 젤웨거증후군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번에는 아들이었다. 그랬다. 이 아이 또한 매우 힘들고 짧은 삶을 살아야 한다. 나는 호프의 상처가 아직 가시지 않은 채 그 고통과 전쟁하고 있는데, 또 다른 폭풍이 우리에게 점점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이 슬펐다. 여러 가지 면에서 이것은 정말 공정하지 않았다.
욥도 나와 같았을까? 재산과 가족을 모두 잃은 큰 슬픔에 쌓인 욥에게 일어난 마지막 고통, 즉 온몸에 난 종기는 욥을 깊은 절망으로 빠뜨렸다. 욥은 자신이 태어난 날을 저주했다. 솔직히 말해 나는 여기에서 진정한 욥의 마음을 볼 수 있어서 기뻤다. 욥이 하나님께 털어놓는 불평들은 아주 비통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욥기의 마지막 부분을 보면, 하나님은 이러한 욥의 정직함을 칭찬하신다. 오히려 충고를 하던 욥의 친구들을 나무라신다.
그러나 욥은 말할 수 없는 고통 중에서도 하나님을 부정하지 않았고 하나님을 향해 등을 돌리지 않았다. 우리는 절망에 빠져 있을 때 하나님을 떠나고 싶은, 기도를 그만두고 싶은 끊임없는 의심의 유혹에 빠질 수도 있다. 상처 받고 화가 나서 심지어 하나님과 아무 말조차 하고 싶지 않을 때도 있다. 하지만 그런 기분들 때문에 결국 우리는 외로워진다. 그리고 그 절망을 사라지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느끼게 되면 어떤 진실도, 어떤 희망도 없이 절망 속에 우리 스스로를 가두어 버린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을 떠나서는 어떤 평안도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 적어도 하나님 없는 지속적이고 깊은 평안은 없다. 오직 하나님 말씀의 진리만이, 하나님의 부드러운 사랑만이, 하나님의 치료의 손길만이 우리가 찾는 평안을 가져다 줄 수 있다.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고, 앞길이 너무 어두워서 단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을 때도 우리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조용히 기다리겠다고 선택할 수 있다.
남편과 나는 그렇게 하기로 선택했다. 이것은 우리가 선택한 길은 아니었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도록 만드신 길이다. 엄청난 어려움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우리는 또 다른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우리의 바람이, 그리고 진리를 발견하려는 우리의 갈망이 우리를 하나님의 마음 한가운데로 이끄는 길로 인도해 줄 것이다.
왜?
‘왜 하필 나인가?‘ ’왜 하필 이런 일이?‘ 라는 질문 외에는 아무것도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 없을 때가 있다. 지금도 우리 부부는 왜 또 우리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싶다.
욥도 고통과 싸우면서 하나님께 “왜?”라고 물으며 대답해 달라고 죽기살기로 매달렸다. 그러나 내가 욥에게 아주 놀란 점 한 가지는 그가 하나님께 매우 담대하게 질문했지만 결코 죄는 범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욥에게는 하나님이 자신의 고통을 사용하심에는 선한 목적이 있고 하나님이 비록 일부분이더라도 그것을 환하게 보여 주실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확신이 있었다. “비록 하나님이 나를 죽이실지라도 나는 그를 신뢰할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그분 앞에서 내 행위를 변명해야겠다. 어쩌면 이것이 나의 구원이 될지도 모른다. 경건치 않은 자는 감히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욥기 13장 15,16절)
호프가 태어나고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 우리는 아는 모든 사람들에게 호프가 얼마 살지 못할 것이며 지금 어떤 상태인지를 적은 카드를 보냈다. 카드 맨 마지막 부분에 “저희 부부는 저희들의 삶과, 앞으로 얼마 살지 못할 우리 딸애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기 원합니다.” 라고 썼다. 말씀을 통해 내가 아는 것은, 어려움 속에서 우리가 하루하루 사는 모습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다는 믿음이다. 나는 호프의 짧았던 인생과 내 인생의 목적이 이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역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이라고 믿는다.
요한복음 9장의 한 이야기 속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소경의 눈먼 것이 누구의 죄 때문인지 물어보는 장면이 있다. 그러자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다. “이 사람의 죄도 부모의 죄도 아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된 것은 이 사람에게서 하나님의 일이 나타나기 위해서이다.” 그렇다, 그 소경의 고통이나 내 딸 호프의 고통 그리고 당신이 겪고 있는 고통의 목적은 모두 같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것인가? 고통 중에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낼 수 있다. 어둠이 심히 우리를 감싸고 심히 고통스러울 때 하나님을 신뢰하는 모습이 바로 하나님께서 가장 귀중하게 생각하시는 믿음인데 이런 믿음은 큰 어려움 중에도 결코 흔들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믿음은 어려운 고통과 시험의 시간 이후의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비록 욥이 고통 중에 흔들렸을지라도 우리는 그가 믿음 안에서 견고하게 서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내가 알기에는 나를 구하실 분이 살아 계시므로 그가 결국 땅 위에 서실 것이다. 내 육체의 가죽이 썩은 후에는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볼 것이며 그때는 내 눈이 그를 보아도 낯선 사람처럼 되지 않을 것이니 내 마음이 한없이 설레이는구나!” 욥은 고통의 현실에서도 미래를 바라보았다. 그는 우리가 고통 받는 중에도 가질 수 있는 단 하나의 희망은 바로 고통을 당하시는 구원자 하나님, 곧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욥은 자신이 하나님께 왜냐고 물었던 고통에 대한 모든 이해와 의문의 답이 어쩌면 살아서 이루어지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았다. 오직 죽음 이후에 하나님과 함께 있을 때 그 모든 것들에 대한 대답이 분명히 드러날 것임을 알았다. 그러나 욥은 고통이라는 어둠 속을 멈추지 않고 걸어갔다.
영원
호프가 죽기 전에는 사람들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천국에 있는 걸 알기 때문에 난 정말 평안해.”라고 하는 말을 정말 이해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잘 알고 있다. 당신이 사랑하는 누군가를 잃으면 천국은 이론적 개념이 아닌 현실로 당신에게 다가온다. 욥이 고통 가운데서 정말 바랐던 것은 단지 그의 고통이 끝나는 것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하는 영원함을 누리는 것이었다. 나 또한 이 땅에서의 삶은 진정한 천국에서 갖는 영원한 삶의 그림자일 뿐이며, 진정한 삶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영원한 삶이라는 시각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인생을 훨씬 더 완전한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이 세상의 삶은 고통으로 가득 차 있다. 그래서 내 딸 호프가 이 세상에서 살면서 받아야 하는 많은 고통과 악함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는 것이 비극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 대신에 그 아이는 지금 하나님과 함께 있다. 이것이 바로 내가 믿는 것이다. 믿음은 내가 느끼는 감정과는 다르다. 그렇지만 내 믿음은 정말로 내가 느끼는 감정을 변화시켰다. 언젠가 이 세상에서 살다가 죽을 때 천국에서 호프와 내 아들 가브리엘뿐 아니라 바로 나의 하나님을 만나게 될 거라고 나는 믿고 있다. 이 사실이 내가 슬퍼하는 것, 그리고 내 인생을 살아가는 방법에 큰 변화를 주었다.
위로자
호프와 함께했던 그 짧은 시간 동안 나는 주위 사람들이 일부러는 아니지만 내게 말실수를 할 수 있으니 관대한 마음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했다. 욥도 자신의 고통뿐 아니라 친구들의 말을 참고 들어야 하는 또 다른 고통을 겪어야 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고난 가운데 있는 사람에게 가장 힘든 일은 사람들이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하나님에 대해 설명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의 위로자들은 이 형편없는 위로자들과는 거리가 멀었다. 내 주위의 많은 사람들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았고, 모든 창조적인 방법을 동원해서 우리에 대한 관심을 표현해 주었다. 나는 축복 받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몇몇 친구들은 아예 나타나지도 않았다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너무 바빴던 친구들과 관심도 없었던 것처럼 보이던 친구들, 혹은 아마도 어떻게 관심을 보여야 할지 몰랐던 친구들도 있었을 것이다. 나는 그들의 한계를 받아들이고 용서하도록 하나님께 기도해야만 했다.
나는 하나님이 욥에게 친구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하신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다. 미워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깨닫게 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로부터 멀어지는 고통에서 자유로워지고 싶고 주님이 주시는 기쁨을 다시금 누리고 싶다면 우리는 친구들을 용서하고 그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 그들의 한계까지도 수용할 수 있다면, 우리는 더 이상 그들에게 헛된 기대를 하거나 실망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비밀
침묵. 우리에게 가장 큰 고통과 혼란을 주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고난의 한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이 아무 말씀도 하지 않는 것이다. 욥은 하나님이 대답해 주시길 원했다. 그는 왜 그가 고통을 받는지 알고 싶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내게 대답하소서!” 욥은 간절히 외친다.
마침내 고난과 의문 뒤의 폭풍으로부터 들리는 목소리가 있었다. 하나님은 “내가 이 세상을 창조했을 때 너는 어니 있었느냐?”라고 욥에게 물으셨다. 이 우주를 만들고 생명을 창조하고 욥의 자녀들, 그의 건강, 혹은 그의 소유물들이 존재하게 하는 데에 욥이 한 일이 뭐냐고 물으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욥기 네 장에 걸쳐 욥이 질문하는 대상이 바로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일깨워 주시면서 욥의 질문들에 대해 하나님 스스로 만드신 질문들을 이용해 대답하신다.
하나님은 설명하지 않으신다. 그의 마스터플랜을 보이지 않으신다. 다만 하나님 자신을 나타내실 뿐이다. 하나님은 고통에 대해, 고통을 어떻게 피해야 하는지에 대해 설명하지 않으셨다. 고통은 비밀이다. 그리고 결국 욥은 그 비밀스러움을 존중했다. 욥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기 때문에 비록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그저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만약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을 잃게 만드신 이유, 병에 걸리게 된 이유, 거절당하는 고통 등의 모든 이유를 목록으로 작성하신다고 해도 우리 인간의 제한된 시각으로는 그 가치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대신 하나님은 우리의 제한된 이해와 경험과는 상반되는, 우주를 경영하시는 그의 능력의 일부를 주심으로써 우리의 관점을 넓혀 주신다. 욥은 자신이 우주적 대결 안의 경기자였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는 참을 수 없는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그의 믿음이 그렇게 중요한 것인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것은 중요했다.
이 땅의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는, 인생의 모든 조각들이 어떻게 맞춰질까, 그것은 무슨 의미를 갖고 있을까를 해독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과제는 이 모든 비밀에 대해 잘 아시는 하나님께 신실한 자, 순종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이런 믿음이 바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이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모든 질문들에 대해 응답하지 않으실 때, 우리가 회오리바람 속에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할 때에도 하나님을 믿기로 결심하는 그런 믿음 말이다.
순종
호프가 태어난 지 한 달 정도 됐을 때 교회에서 일하는 비서가 전화를 걸어 우리가 대표 기도자 명단에 있다고 했다. 하나님의 기적으로 호프를 낫게 해달라는 기도 요청을 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우리는 하나님께 그런 것을 요구하지 않았다. 별로 옳은 방법으로 보이지 않았고, 한편으로는 기도하는 것이 두려웠을 지도 모르겠다.
그 몇 주 동안 하나님은 나에게 분명히 말씀하시고 계셨다. 실제로 귀에 들리는 음성은 아니었지만 이전에 늘 하시던 대로 성경을 통해 말씀하셨다. 하갈이 어려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어할 때 하나님은 사막에서 하갈에게 다시 돌아가서 순종하라고 말씀하셨다. 동시에 주일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칠 때 했던 이야기도 떠올랐다. 마리아에게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것을 말하러 온 천사의 이야기였다. 그때 마리아는 어떻게 반응했는가? “저는 주의 종이오니 말씀하신 대로 따르겠습니다.”라고 했다. 하나님이 자신의 인생에 가져다 준 그 일은 유대 처녀 입장에서 마치 재앙과도 같았겠지만 마리아는 순종했다.
나는 다시 한 번 하나님이 우리 앞에 세우신 계획에 순종해야 한다고 느꼈고, 슬픔과 역경 그리고 절망의 한가운데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을 신뢰하며 나아가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 주는 그 길로 가야 한다고 느꼈다. 그것은 내가 내 딸을, 내 가족을, 내 인생을 위해서 세워 놓은 계획들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고 모든 것들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을 의미했다.
욥의 이야기 마지막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욥의 고통을 어떻게 사용하셨는지 조금 알 수 있다. 그 모든 눈물과 질문들 후에 하나님은 모든 것을 창조하신 주권자로서 자신을 드러내셨고, 욥은 온 우주와 자신의 인생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권위를 깨닫고 하나님의 주권에 순종하게 된 것이다. 또한 예수님이야말로 순종을 보여 주는 완벽한 예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주권에 복종한다는 것은, 우리가 이해하든지 못하든지, 알든지 모르든지, 동의하든지 않든지 간에 하나님 앞에 무릎 꿇는 것을 의미한다. 그 복종 가운데서 우리는 계속 전진할 수 있는 능력과 은혜를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심지어 기쁨을 발견할 수도 있다.
친밀
이제 우리는 욥의 이야기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렀다. 욥은 재산을 모두 잃고 자식들은 죽었으며 여전히 그의 몸은 종기로 덮여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친근하고 분명하게 자신을 드러내셨을 때, 욥은 자기가 하나님을 따르고 경외했지만 하나님을 진정으로 알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는 고통을 통해 하나님을 새롭게 알게 되었으며 앞으로의 인생을 어떻게 좀더 의미 있게 살 수 있는지도 깨닫게 되었다. 욥은 하나님께 이렇게 말한다. “나는 당신에 대해서 전부터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당신을 내 두 눈으로 직접 보았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어두운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만 주실 수 있는 초자연적인 능력과 평화를 경험했다. 내 남편에게는 약간 비관적인 면이 있다. 그는 반 컵의 물을 보고 컵에 물이 반밖에 없다고 생각할 뿐만 아니라 나머지 반의 물도 얼마 되지 않아 엎어져 쏟아질 거라고 말한다. 그는 항상 자기 인생에 비극이 일어날 것을 두려워해 왔다고 말했다. 이제 비극이 이미 왔으니 두려움이 없다고 한다. 그는 가장 커다란 두려움을 경험했고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위대한 신실하심을 경험했다. 그는 더 이상 우리 인생에서 일어날 비극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사도 바울 또한 하나님에 대해 머리로 아는 것과 경험으로 아는 것이 어떻게 다른지 경험했다. 하나님에 대해 진실하게 아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도록 해주고 우리 인생이 하나님께 집중하도록 한다. 또한 하나님만이 우리 인생의 목적이 되게 하고 우리에게 허락하신 고통의 목적이 되게 한다.
바울과 마찬가지로 욥도 극심한 고통을 통해 하나님과 친근한 관계를 갖게 되었다. 하나님의 마음에 이르는 그 길이 고통을 통해서만 알 수 있다는 것은 참 독특한 일이다. 사실 고통이 아닌 다른 것으로는 하나님의 마음에 이르는 길을 찾을 수 없다. 우리는 상처 받았을 때 하나님께로 달려간다. 그러면서 우리에게는 힘이 없고 하나님에게는 능력이 풍성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동안 하나님은 그분이 우리가 알던 것보다 더욱 따뜻하고 신실한 분이라는 것을 알게 해주신다. 우리는 하나님과 아주 친밀하다는 것을 발견하고 희망을 간직할 능력을 받게 된다. 전에는 이런 것을 전혀 경험할 수 없었다. 우리는 이전에 보지 못했던 것들을 언젠가 보여 주실 것이라는 성경적인 희망과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이 예비해 두신 영원한 미래에 대해 확신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목적이다. 욥은 잃었던 모든 것보다 더한 복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고통과 슬픔이 없이는 결코 찾을 수 없었던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 좀더 친밀한 관계를 갖게 되었다.
하나님을 찾으려 하기만 한다면 하나님은 당신과 나를 위해서도 같은 목적을 갖고 계신다. 우리가 진실로 하나님의 마음을 발견하려면 오직 우리들의 상황을 살펴보고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한다. 고통 받으신 우리의 구원자를 바라볼 때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을 볼 수 있다. ‘우리를 위하여 아들을 보내신’ 사랑의 하나님이 바로 거기에 있다. 우리가 십자가를 바라볼 때, 우리를 대신하신 십자가의 고통을 볼 때, 하나님이 우리의 고통을 이해하고 계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도록 스스로 고통 받기로 선택하셨던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변화되기 원하신다. 하나님은 “저는 하나님에 대해서 들어보기만 한 것이 아니랍니다. 저는 정말 하나님을 보았어요! 저는 정말 하나님을 알아요!”라고 말할 수 있는 바로 그곳으로 당신이 오길 원하신다. 그리고 당신이 그렇게 되도록 당신의 인생에서 고통을 사용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을 벌하거나 상처를 주기 위해 고난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더 가까이 나아오도록 고난을 주신다.
당신은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겠는가?
에필로그
나는 이 글을 쓰면서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하지만 곧 울 것이다. 지금 이 순간 나는 가브리엘을 생각하면서 입가에 미소를 짓고 있다. 그 아이는 얼마나 소중하고 달콤한 선물이었는지! 가브리엘의 6개월 간의 짧은 생애 동안 우리는 그의 메시지가 무엇이었는지 궁금했다. 아마도 거기에는 많은 메시지가 있었던 것 같다.
그 중 한 가지는 아기를 잉태케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이제 그 누구도 생명의 문제에 대해 나에게 더 이상 설명해 줄 필요는 없다. 왜냐면 이제 그것이 어떤 것인지 깨달았기 때문이다. 또 한 가지, 가브리엘은 그의 누나 호프와 함께 나에게 인생의 가치가 오래 사는 것, 성공에 따라 좌우되는 것이 아님을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가브리엘은 하나님이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시려고 약한 것을 사용하신다고 말해 주고 있다(고린도전서 1:27). 하나님은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한 아이를 사용하셔서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우주의 진리를 보여 주시는 데 사용하셨다.
구약성경 다니엘서에 보면 하나님은 다니엘이 보았던 환상의 뜻이 무엇인지 설명해 주기 위해 천사 가브리엘을 보내셨다. 가브리엘은 “다니엘아, 내가 여기에 온 것은 너를 도와 하나님의 계획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이다.”라고 말하면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회복될 것과 ‘유대의 왕’ 예수님이 오실 것을 알려 주었다. 또한 신약에서 하나님은 천사 가브리엘을 마리아에게 보내셔서 “그는 위대한 인물이 될 것이며 가장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릴 것이다.”라며 그녀가 예수님을 잉태할 것을 말해 주신다. 가브리엘의 메시지는 항상 예수님에 관한 것이었다. “두려워하지 말라. 예수께서 오실 것이다.” 이 메시지는 이방의 포로로 잡혀 있던 다니엘과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희망을 안겨 주었다.
고통 한가운데서 하나님을 찾으려는 당신과 나에게도 이 하나님의 메시지는 동일하게 예수님에 관한 것이다. 두려워 말고 얼굴을 들어 다가올 미래를 바라보라. 예수님이 오실 것이다.